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를 경험한 세계 여러 나라는 자신의 역사에서 제국주위를 위해 행동한 반민족 부역행위에 대해 단호히 처리하였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수립 후 국민과 국회의 힘으로 반민특위를 구성해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시도했으나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1910년대 대구의 대표적 친일 단체는 1917년에 대구부 주도로 결성된 교풍회(矯風會)였다. 이 교풍회는 대구부윤, 경북 경무국장, 도참여관 등이 고문이 되고, 조선인이 회원이 되는 형태였고, 각 구를 하위 단위로 하여 구성하였다. 여기에 서경순, 서병규, 정해붕 등 대구의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겉으로는 폐습 타파와 상호 부조를 내세웠지만 조선인들의 민심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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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자, 친일파들은 이 3·1운동을 "사리를 해아리지 않고 국정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이라 하고, "조선의 독립은 허망한 것"이라며 선전하였다. 특히, 대구성의 성벽과 객사를 허무는데 앞장섰던 박중양(朴中陽)은 4월 6일에 대구의 자제단(自制團)을 만들고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박중양은 자제단을 통해 "경거망동으로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하 자제"하며, "불령(不逞)한 무리를 배제"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여기에는 신석린, 박성유, 서병조, 김병수, 윤병오 등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신석린은 안동군의 자제단을 조직한 후 의성과 안계에서 자제단 조직을 위해 일하였고, 박성유와 서병조는 성주군 자제단을 조작하고, 김병수와 윤병오는 경주군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박중양은 칠곡, 김천, 선산에서 자제단 조직을 위해 일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의 실천운동'이 실시되었고 이 시기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표적 친일단체는 다음과 같다.
▣ 대구의 주요 친일단체 및 조합, 1941년 현재 ▣
일본적십자사 경상북도지부, 1911년 1월
일본적십자사 대구위원회, 1921년 1월
국방의회 경상북도연합회, 1935년 4월
재향군인대구부연합분회, 1925년 2월
대구국방의회, 1933년 12월
대구경방단, 1939년 10월
경북유도회 ★
대구유도회 ★
사회사업협회 대구부분회
대구녹화협회, 1933년 5월 ★
대구상성회, 1911년 4월
대구소년단, 1931년 10월
대구연합청년단, 1938년 2월
대구방면사업 조성회, 1939년 3월
대구부교화단체 연합회, 1935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대구연맹, 1938년 7월
재국군인후원회 대구부분회
대구구군사후원연맹
대일본상이군인대구부분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
★ 표시는 조선인이 대표인 단체임
◈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중대구 위원, 1941년 ◈
박중양(朴中陽), 정해붕(鄭海鵬), 장직상(張稷相), 서상일(徐相日), 서병원(徐丙元), 서병국(徐丙國), 이장우(李章雨), 윤상태(尹相台), 이상무(李相武), 김찬수, 신옥(申鈺), 박노경(朴魯庚), 서병조(徐丙助), 임상조(林尙助)
※ 자료 :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개요』, 1941.
반민족행위자들은 일제와 결탁해 민족운동전선을 분열시키고, 민족운동의 역량을 감퇴시켜 식민지 지배를 연장시켰다. 이 시기 친일세력은 정치세력화하면서 일제의 황도정신을 선양하며 황국신민화 정책과 수탈정책에 적극적인 자세로 충실히 복무했다. 또한 반민족행위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시킨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편승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흩뜨리는 해악을 끼쳤다. 더욱이 사람들이 제대로 지키고 양성해야 할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회적 희망을 빼앗았다.
때문에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1945년 이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처벌이 필수였으나 이승만의 개인적 욕심과 반민족행위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단죄의 시기가 너무 늦어지고 있다.
대구의 대표적 친일활동
장직상(張稷相, 1883~1959)은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는데 1944년부터는 주임관(奏任官) 대우에서 칙임관(勅任官) 대우를 받았다. 그는 천도교의 최인 등이 신생활 수립, 신인생관 확립, 내선일가(內鮮一家)의 결성 등을 내세워 친일단체 시중회(時中會)를 창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40년 일제가 동화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하리모토(張元稷相)로 창씨하였다. 또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 겸 경제부 경제위원, 1941년 홍아보국단경북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5년 대의당 당원, 대아동맹 심의원 등의 반민족행위를 행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동족을 전장으로 내모는 학병 권유 강연을 했다. 특히, 그는 막대한 재력으로 일제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자진 기증하기도 하고, 대표적인 친일자본가 박흥식 등과 함께 가장 악질적인 친일단체인 대화동맹의 경비와 사업비를 담당하였다.
서상돈의 아들인 서병조(徐丙助, 1886~1952)는 일본인으로부터 "경북의 유력가로 중추원 참의가 된 우리의 충실한 협조자"로 칭송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1913년 일본적십자사 대구지부에 대한 협찬을 시작으로 일제의 관변단체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가 가입한 대표적 관변단체로 명치신궁봉찬회 대구지부 경북위원, 재단법인 대구상성회 평의원, 국민협의 상담역, 제국재향군인회후원회 부회장, 대구 녹화협회 회장,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구지부 회장 등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친일활동을 통해 일제의 강력한 협조자로 인정받아 1924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제의 조선 지배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1934년에는 지방공로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서병조는 1940년 일제의 창시개명 정책에 맞추어 대봉병조(大峰丙朝)로 개명하였다.
일제가 1940년 10월 16일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발족시켜 일제의 충실한 주구들로 내선일체의 철저 및 황국신민화, 신도(臣道) 실천, 직역 봉공에 의한 고도 국방국가체제를 확립시키려 하자, 그는 이 연맹에 이사로 참여하여 동조동근(同祖同根)을 내세우며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파괴한 일제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는 다음해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친일배들이 개최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에 장직상과 더불어경북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22일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일제의 황국신민화 운동의 첨병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앞서 같은 달 7일 대구 공립학교 강당에서 최린, 이성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대회에서 15명으로 구성된 상임이사가 되었다.
이처럼 서병조는 그 자신이 참여한 단체 및 공직을 합하면 무려 60여 개나 될 정도로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정력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병조 일가는 일제 통치정책과 전쟁동원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 협력하였다. 먼저 서철순(서병조의 조부)의 종형인 서상홍의 장남인 서병규(徐丙奎)는 일제가 지방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설치했던 대구부협의회의 제1기 의원을 지냈다. 서상돈의 동생인 서상정(徐相定)의 아들이며, 서병조의 종형인 서병무(徐丙武)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대구학교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학교평의회는 일제가 식민지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하여 조선인 교육에 관한 경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서상돈의 3남으로 서병조의 동생인 서병주(徐丙柱)는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대구부협의회원,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대구학교평의원회원을 지냈다. 서병조의 3남 가운대 둘째인 서정호(徐精浩)는 1939년부터 대구부회의 의원과 대구경방단 제5분회 분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 창씨개명 정책에 맞추어 대봉정호(大峰廷浩)로 개명하였다. 서병조의 아들 정식도 1943년 보호관찰소 보호사가 되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친일행위를 벌였다.
반민족 행위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이 헬조선에 넘쳐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민족정신이 말살된 채 개·돼지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니들 그런가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