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살기위해 양심과 바꾼 흙수저의 탄원서

불혹을 넘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어느 흙수저인 직장인,

그는 중소기업에 입사하고 1년 남짓 지났을 무렵,

소기업 사장은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에 의거 구속되기에 이른다.

흙수저로 태어나 온전히 자신이 가진 것은 호두알 두 쪽밖에 없었다.

그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 부여전에서

대국가 부여의 1책 12법에 심취해 있었고 부여의 법이 헬조선에도 동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였다.

당시 부여시대의 법이 엄하여서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으며 도둑질한 자는 12배를 배상하도록 하였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대한제국의 국가 재산을 개인의 영달을 위해 훔친 도적들이며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헬조선에서 대통령, 국회의원, 도지사 등 공직사회에 차고 넘치며 대한민국에 해악을 끼치고 있다.

1945년 해방, 1950년 6.25,  군사 쿠데타, 12.12사태, 5.18 민주화운동 등을 거치면서

근대 역사의 대부분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자신의 목숨 줌을 지키기 위해 반공을 일반 국민에게 주입하며 살아왔다.

그 사이 깨어있는 지식인과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재력과 음해로 대부분 억울하게 돌아가신 경우가 부지기수다.

일본기업이며 한국어도 제대로 못하는 ㅅㄷㅂ이 회장인  ㄹㄷ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호텔, 백화점, 마트, 건설, 화학, 제과 등을 가진 대기업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을 보면 과거를 잊은 헬조선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ㄹㄷ건설 300억원 비자금을 조성하고

2심에서 고령(1947년, 72세)이라는 이유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ㅇㅊㅂ의 보석을 위해

양심과 월급을 바꾼 어느 직장인이 쓴 탄원서가  Zenoah의 마음을 울린다.

이 흙수저의 탄원서는 월급과 진정 바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헬조선에 이런 원치 않는 탄원서를 자필로 쓴 자가 얼마나 많을까?

는 뇌병련 3급 장애인 아버지와

척추 수술을 해 거동이 불편하신 어머니,

통풍과 무기력증으로 고생하는 장모님,

천식으로 하루하루 너무나 힘들어 하는 초등학교 3학년 딸,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7세 아들과

저만 바라보며 살고 있는 아내와 저를 포함한 7명을 부양하고 있는

41살의 소기업을 다니는 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제가 다니고 있는 소기업은

피고인이 설립하여 경영중인 ㅇㅇㅍㅌㅂㅋ입니다.

ㅇㅇㅍㅅㅂㅋ는 구매대행사업을 영위하는 기업으로

최고경영자의 부재는 회사 존폐를 결정하는 엄청난 위기입니다.

피고인의 부재로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제가 부양하고 있는 7명의 가족은 당장 한 끼 끼니를 걱정해야 합니다.

피고인에게 선고된 징역형은 위법행위에 대한 판결이라 하지만

저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 되어 돌아오지 않기를 기도하고 소원합니다.

재판장님 피고인이 지은 죄는 처벌을 받아 마땅하나

저와 같이 소기업에서 한 순간 직장을 잃어 고통받을 수 있는

선량한 직원들의 가족을 한 번만 돌아봐 주시고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이런 탄원서로 ㅇㅊㅂ는 2018.03월 보석으로 1심 구속만기전 풀려났다.

(떡검과 개판새, 언론은 서로 호응하고 범죄자를 조용히 풀어주었다)

오호 통재라~

헬조선의 불평등의 뿌리는 어디일까? 친일파들의 이야기(1)

우리나라와 같이 식민지를 경험한 세계 여러 나라는 자신의 역사에서 제국주위를 위해 행동한 반민족 부역행위에 대해 단호히 처리하였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수립 후 국민과 국회의 힘으로 반민특위를 구성해 친일파에 대한 단죄를 시도했으나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1910년대 대구의 대표적 친일 단체는 1917년에 대구부 주도로 결성된 교풍회(矯風會)였다. 이 교풍회는 대구부윤, 경북 경무국장, 도참여관 등이 고문이 되고, 조선인이 회원이 되는 형태였고, 각 구를 하위 단위로 하여 구성하였다. 여기에 서경순, 서병규, 정해붕 등 대구의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겉으로는 폐습 타파와 상호 부조를 내세웠지만 조선인들의 민심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3·1운동이 들불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자, 친일파들은 이 3·1운동을 "사리를 해아리지 않고 국정을 알지 못하는 자의 경거망동"이라 하고, "조선의 독립은 허망한 것"이라며 선전하였다. 특히, 대구성의 성벽과 객사를 허무는데 앞장섰던 박중양(朴中陽)은 4월 6일에 대구의 자제단(自制團)을 만들고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박중양은 자제단을 통해 "경거망동으로 국민의 품위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도록 상하 자제"하며, "불령(不逞)한 무리를 배제"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여기에는 신석린, 박성유, 서병조, 김병수, 윤병오 등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신석린은 안동군의 자제단을 조직한 후 의성과 안계에서 자제단 조직을 위해 일하였고, 박성유와 서병조는 성주군 자제단을 조작하고, 김병수와 윤병오는 경주군 자제단을 조직하였다. 박중양은 칠곡, 김천, 선산에서 자제단 조직을 위해 일하였다.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의 실천운동'이 실시되었고 이 시기 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표적 친일단체는 다음과 같다.


▣ 대구의 주요 친일단체 및 조합, 1941년 현재 ▣

일본적십자사 경상북도지부, 1911년 1월

일본적십자사 대구위원회, 1921년 1월

국방의회 경상북도연합회, 1935년 4월

재향군인대구부연합분회, 1925년 2월

대구국방의회, 1933년 12월

대구경방단, 1939년 10월

경북유도회 ★

대구유도회 ★

사회사업협회 대구부분회

대구녹화협회, 1933년 5월 ★

대구상성회, 1911년 4월

대구소년단, 1931년 10월

대구연합청년단, 1938년 2월

대구방면사업 조성회, 1939년 3월

대구부교화단체 연합회, 1935년 9월

국민정신총동원대구연맹, 1938년 7월

재국군인후원회 대구부분회

대구구군사후원연맹

대일본상이군인대구부분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대구지부 ★

★ 표시는 조선인이 대표인 단체임


◈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중대구 위원, 1941년 ◈

박중양(朴中陽), 정해붕(鄭海鵬), 장직상(張稷相), 서상일(徐相日), 서병원(徐丙元), 서병국(徐丙國), 이장우(李章雨), 윤상태(尹相台), 이상무(李相武), 김찬수, 신옥(申鈺), 박노경(朴魯庚), 서병조(徐丙助), 임상조(林尙助)

※ 자료 : 조선임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개요』, 1941.


반민족행위자들은 일제와 결탁해 민족운동전선을 분열시키고, 민족운동의 역량을 감퇴시켜 식민지 지배를 연장시켰다. 이 시기 친일세력은 정치세력화하면서 일제의 황도정신을 선양하며 황국신민화 정책과 수탈정책에 적극적인 자세로 충실히 복무했다. 또한 반민족행위는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말살시킨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편승하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흩뜨리는 해악을 끼쳤다. 더욱이 사람들이 제대로 지키고 양성해야 할 가치관을 혼란케 하고 사람들의 일상적인 사회적 희망을 빼앗았다.


때문에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1945년 이후 반민족행위에 대한 역사적 처벌이 필수였으나 이승만의 개인적 욕심과 반민족행위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단죄의 시기가 너무 늦어지고 있다.


대구의 대표적 친일활동


장직상(張稷相, 1883~1959)은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는데 1944년부터는 주임관(奏任官) 대우에서 칙임관(勅任官) 대우를 받았다. 그는 천도교의 최인 등이 신생활 수립, 신인생관 확립, 내선일가(內鮮一家)의 결성 등을 내세워 친일단체 시중회(時中會)를 창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40년 일제가 동화정책을 추구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하리모토(張元稷相)로 창씨하였다. 또 그는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 겸 경제부 경제위원, 1941년 홍아보국단경북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5년 대의당 당원, 대아동맹 심의원 등의 반민족행위를 행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동족을 전장으로 내모는 학병 권유 강연을 했다. 특히, 그는 막대한 재력으로 일제의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자진 기증하기도 하고, 대표적인 친일자본가 박흥식 등과 함께 가장 악질적인 친일단체인 대화동맹의 경비와 사업비를 담당하였다.


서상돈의 아들인 서병조(徐丙助, 1886~1952)는 일본인으로부터 "경북의 유력가로 중추원 참의가 된 우리의 충실한 협조자"로 칭송을 얻은 사람이었다. 그는 1913년 일본적십자사 대구지부에 대한 협찬을 시작으로 일제의 관변단체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가 가입한 대표적 관변단체로 명치신궁봉찬회 대구지부 경북위원, 재단법인 대구상성회 평의원, 국민협의 상담역, 제국재향군인회후원회 부회장, 대구 녹화협회 회장,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구지부 회장 등이 있었다. 그는 이러한 친일활동을 통해 일제의 강력한 협조자로 인정받아 1924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중추원 부의장이 되어 일제의 조선 지배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였다. 1934년에는 지방공로자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았다. 서병조는 1940년 일제의 창시개명 정책에 맞추어 대봉병조(大峰丙朝)로 개명하였다.


일제가 1940년 10월 16일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을 발족시켜 일제의 충실한 주구들로 내선일체의 철저 및 황국신민화, 신도(臣道) 실천, 직역 봉공에 의한 고도 국방국가체제를 확립시키려 하자, 그는 이 연맹에 이사로 참여하여 동조동근(同祖同根)을 내세우며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파괴한 일제에 적극 호응하였다. 그는 다음해 8월 24일 조선호텔에서 친일배들이 개최한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에 장직상과 더불어경북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같은 해 12월 22일 서울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성대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일제의 황국신민화 운동의 첨병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앞서 같은 달 7일 대구 공립학교 강당에서 최린, 이성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경북지부 결성대회에서 15명으로 구성된 상임이사가 되었다.

이처럼 서병조는 그 자신이 참여한 단체 및 공직을 합하면 무려 60여 개나 될 정도로 반민족적 친일행위에 정력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서병조 일가는 일제 통치정책과 전쟁동원정책에 적극적으로 호응 협력하였다. 먼저 서철순(서병조의 조부)의 종형인 서상홍의 장남인 서병규(徐丙奎)는 일제가 지방통치를 원활히 하기 위해 설치했던 대구부협의회의 제1기 의원을 지냈다. 서상돈의 동생인 서상정(徐相定)의 아들이며, 서병조의 종형인 서병무(徐丙武)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대구학교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학교평의회는 일제가 식민지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설치하여 조선인 교육에 관한 경비 마련을 위한 것이었다. 서상돈의 3남으로 서병조의 동생인 서병주(徐丙柱)는 1924년부터 1926년까지 대구부협의회원,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대구학교평의원회원을 지냈다. 서병조의 3남 가운대 둘째인 서정호(徐精浩)는 1939년부터 대구부회의 의원과 대구경방단 제5분회 분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0년 창씨개명 정책에 맞추어 대봉정호(大峰廷浩)로 개명하였다. 서병조의 아들 정식도 1943년 보호관찰소 보호사가 되었다. 그들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일제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친일행위를 벌였다.


반민족 행위자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이 헬조선에 넘쳐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민족정신이 말살된 채 개·돼지로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아니들 그런가 들....

선덕여왕의 혜안

일연스님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紀異)에 〔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가지 일〕 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27대 덕만(德曼 또는 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요,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당태종 이세민의 연호) 6년 임진(632)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 미리 기미를 안 일이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이것이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 빛과 자줏빛, 흰 빛으로 그린 모란과 그 씨 3승(升-되)을 함께 보냈다. 왕은 이 그림의 꽃을 보더니 말하기를 "이 꽃은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하고 뜰에 심으라고 명했다. 거기에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기다려보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둘째는 이것이다.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에 겨울인데도 개구리가 많이 모여들어 3,4일 동안 울어댄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괴상히 여겨 왕에게 물으니, 왕은 급히 각각 알천(閼川), 필탄(弼呑) 등에게 명하여 정병 2천명을 거느리고 속히 서교(西郊)로 가서 여근곡(女根谷)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의 군사가 있을 것이니 이를 쳐서 죽이라 했다.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천 명씩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 보니 부산(富山) 밑에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군사 5백 명이 거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죽였다. 백제의 장군 오소란 자가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으므로 또 포위하고 활로 쏘아 죽였다. 또 후속부대 1천 3백 명이 오는 것을 또한 쳐서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이것이다. 왕이 아무런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 죽을 것이니 도리천 속에 장사 지내라" 했다. 신하들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어 어디냐고 물으니, "낭산(狼山) 남쪽이다."했다. 그날이 되자 과연 왕이 죽으므로 신하들은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뒤 10여 년이 지나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사천왕사(四天王寺, 경주 왕산리에 있던 절)를 왕의 무덤 아래에 세웠는데, 불경에 "사천왕천(불교에서 말하는 욕계 육천 중 제1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했으니, 이것이 비로소 대왕의 신령스럽고 성스러움을 알 수 있었다.


당시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꽃과 개구리의 일을 아셨습니까?"하니, 왕은 말하기를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음을 알 수 있었소. 이는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군사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여자의 음부(陰部)인데,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백색이니 백색은 곧 서쪽이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또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되니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소." 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그 성스럽고 지혜로움에 감복했다. 꽃을 세가지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을 알고서 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곧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일을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이 영묘사를 세운 일은 모두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신라별기(新羅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를 쌓았다."고 했다.


우리는 역사상 왜 신라에만 선덕왕, 진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여왕이 있었던가에 대한 궁금증을 갖는다. 당시에도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여주는 정사를 잘하지 못한다.' 하고 비담(毗曇)은 따르는 군사를 이끌고 명활성에 주둔하여 반란을 일으킨다. 왕의 진영에는 김춘추와 김유신 [신라 왕실에서 중심에서 벗어나 있던 진골과 가야귀족출신의 무인세력], 즉 기존 세력과는 차별되는 신흥세력이 있었다. 즉 왕의 등극은 최초의 여왕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신라사회에 새로운 정치집단의 등장을 의미한다. 김유신은 신-구세력간의 군사대결에서 별이 떨어져 불리하던 전황을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민심을 얻고 군사들을 북돋우어 반전시킨다.

선덕왕릉(善德王陵)은 경주 낭산에 위치하고 있다. 낭산은 신유림(신들이 노니는 숲)이라고도 불리는 신라에서 매우 신성시되는 땅이다. 왕은 돌아가시고 나신 뒤에 사천왕사가 세우질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낭산 남쪽을 지목하여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다.


영묘사(靈廟寺)는 현재 홍륜사라는 절에 있었던 사찰로 원래 홍륜사는 현 경주공업고등학교부지로 추정된다. 영묘사터에서 출토된 얼굴무늬 수막새는 잘 알려진 작품이며 일본인들이 가져갔다가 반환된 유물이다. 오늘날 기업광고 이미지로도 응용되고 있다.

부산성(富山城)은 경주 서쪽 건천에 있으며 이 부근의 고인돌을 '부산성 쌓으러 방구(바위의 경상도 표현)를 옮기다가 성을 다 쌓았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만리장성이 등장하는데 여기에서는 부산성으로 대체된다. 테뫼식 산성의 둘레는 7.5km, 내부는 100만평에 이른다.


여근곡(女根谷)은 부산성의 북사면에 있으며 음습(陰濕)한 기운이 충만하다. 이 일대는 소출이 많은 풍요로운 벌판이며 섶을 표현하여 신평(薪平)이라 불린다. 그 북쪽으로 양지바르고 전망 좋은 곳에 신라왕이 자주 올랐다는 나왕대(羅王臺)가 있고 자지터라는 마을도 있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역사적 사실여부를 떠나서 신라인들의 생각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부분이다.

왕은 삼국유사 기록으로 보아도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였고 개인적으로 뛰어난 능력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위기상황을 판단하여 행동에 옮기기도 하고 불교교리에도 매우 밝았던 것으로 보인다.

왕은 분황사를 창건하여 많은 고승대덕들이 사상연구에 매진하여 국가근본을 이루었고 황룡사 9층 탑을 세워 신라를 세상의 중심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첨성대 역시 천문을 보아 국가의 길흉을 판단하던 시설이었으니 왕의 재위 16년 동안 실로 많은 업적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태종무열왕 문무왕 때에 이르러 삼국통일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기반도 선덕왕대에 다져놓은 것이었다.


1500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선덕여왕은 혜안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으나, 일본의 개 노릇을 자처한 민족반역자이며 쿠데타로 민족의 시대정신을 유린한 독재자의 딸X은 혜안은 고사하고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입을 봉한채 오롯이 푸른 기와집의 안방마님 노릇만을 원하니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도 망국(亡國)의 길로 가고 있음이렸다. 쯧쯧


'Life 108/depression'에 해당되는 글 5건

1 2 →